사랑의 효도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대목에서 당신이 이제 떠나가야할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물을 담아서 한사람 한사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다. 베드로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가 손사례를 치면서 이렇게 외친다. "절대 제 발만은 씻으실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제 발을 씻으려고 하십니까?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너의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없는 사이가 된다.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 너와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발뿐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씻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목욕을 한 이는 발만 씻어도 된다." 예수님이 베드로 제자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서 발을 씻어주는 그 광경을 상상해보면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장면이다.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셔서 무릎을 꿇고 허리를 조아리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 베드로가 나라면 그 앞에 황송스러워서 서 있을 수 있을까? "네가 그러지 않으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 신앙이라는 것은 관계와 연관이 있는거다. 하느님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사는 사람인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살 것인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상관이 있는 관계가 된다. 관계가 중요한 거다. 나는 누구하고 어떤 사람하고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사는가? 그게 인생이다. 관계가 왜 중요한가하면 어떤 한 사람이 사고를 당해서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람이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다.그러면 아무 반응이 없다. '아, 안됐네' 그러면 끝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죽고 어린아이들이 죽어나가는데 우리는 아무 감정이 없죠.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아무 상관없다. 만일에 내 아이가 굶어죽었다면 내 남편이 사고를 당해죽었다면 똑같은 한 인간이 죽은 건데, 완전히 다른거다. 하느님과 우리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사느냐? 그게 중요한거다. 아무 상관이 없는 관계를 맺고 살면 이 신앙의 삶이 무미건조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도 아무 감흥이 없고, 채찍을 맞아서 눈알이 빠지고 살갖이 드러나도 아무 감흥이 없는거다. 그런데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이와 같이 예수님이 우리와 사랑하는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관계라면 다르다. 예수님의 그 수난과 죽음을 그냥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지 않겠죠.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 이게 진실된 신앙이 되느냐? 거짓된 신앙인으로 사느냐? 그 차이인거다.
만일에 어떤 아이가 부모에게 너무 불효를 하고 사니까 부모가 생각하죠. "부모에게 효도 좀 하고 살아라. 내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그러니까 자식이 와서 그런얘기를 하는거죠. "효도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용돈 한달에 10만원씩 드릴께요. 적으세요? 50만원 드릴께요. 그리고 또 원하는거 말해보세요. 한 달에 한번씩 찾아올께요.됐죠? 또 원하는거 말해보세요. 매일 한번씩 전화 할께요. 그러면 됐죠?" 그러면 자녀는 그렇게 살아가면서 효도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부모가 바라는 효도는 그런 효도가 아니다. 사랑의 관계, 이게 부모 자식간의 관계여야 효도라는 게 성립하는 거다. 외적으로 일주일에 한번 찾아오고 부모에게 용돈 주듯이 하느님께 용돈 드리고, 그리고 '나 훌륭하고 진실되게 신앙생활하는 신앙인이다'라고 한다면 부모인 하느님의 마음은 문들어지는거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그런 형식적이고 율법적이고 계산적인 관계가 아니듯이,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율법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산술적인 관계입니까?
구약은 그런 부모 자식관의 관계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서 용돈드리고, 안식일에 찾아뵙고 또 전화드리고 그러면 효도 다 하는 줄 알았다. 거기까지 하고 나머지는 나 하고싶은데로 살고, 내 마음은 딴데 가 있다. 하느님이 하라고 하는 십계명은 다 지켰으니까, 훌륭한 신앙인, 훌륭한 백성, 훌륭한 민족 아닙니까? 그리고 허리 딱 피고 하느님 앞에서 떵떵거리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게 아니다 수없이 이야기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다. 거기까지가 구약이다. 우리가 아직도 하느님을 이런 율법적인 관계, 산술적인 관계, 외적인 형식적인 관계로 살아가고 있다면 아직도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거다. 아직도 구약의 삶을,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거다. 그들의 삶의 결과는 뻔하다. 방황하고, 귀양가고, 사라져가고, 우리는 그러한 전처를 밟아서는 안된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율법적인 관계가 아니다 사랑의 관계이다. 이거는 회복해야한다. 이거를 극복해야 된다. 율법적이고, 계산적이고, 제한적이고 외적이고 산술적이고 이 관계를 극복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새로운 계명을 준다. 구약에 그렇게 너희들을 짓눌렸던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라.내가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모범을 보여준거다. "내가 어떻게 너희를 사랑하고 있는지 똑똑히 볼 수 있게 내가 사랑하는 모습 보여줄께." 그리고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더러운 발을 그 고귀한 손으로 닦아주는거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와 너희는 율법적인 그런 관계가 아니다. 사랑의 관계이다. " 사랑하면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용돈 좀 덜 드려도 된다. 그럼 부모가 자식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이해해준다. '너 지금 형편이 많이 안 좋아져서 그렇구나. 내가 좀 절제하며 살아야지.' 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을 안다면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찾아오지 않는 날이 되면 '아, 얘가 직장 때문에 바쁜가 보다.' 하고 이해해준다. 그러니까 율법을 빼먹어도 한번, 두번 찾아오지 않아도 불효하는 게 아니다. 마음만 있으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주일 꼬박꼬박 지켰고, 봉사도 열심히하고 ,매일 매일 전화드리듯이 기도하고 그랬으니 나는 효도한거 맞지? 나 효자 맞지? 그런 관계는 하느님 보시기에 마음아픈 자식으로 보이는거다. 사랑의 관계에는 수학적으로 산술적으로 계산이 안된다. 목숨을 바쳐 우리를 위해서 당신 아들을 내 주신 게 그게 어떻게 이해가 되요? 사랑은 이해가 안되는거잖아요? 아들을 우리한테 내주어 죽게하셨다. 그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겠어요? 그리고 또 그 아들인 예수님은 그 수난을 다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했다. 그걸 어떻게 용돈 50만원 주는 걸로 대체될 수 있겠어요? 안되죠. 그러므로 오직 마음을 드리는 것,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장 큰 계명을이야기하시면서 내 마음을 다하여라 그게 사랑의 관계인거다.
오늘 1독서에서도 똑같이 하느님은 눈으로보이는 그런 외적인 모습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속 마음을 보시는 분이다. 다윗의 형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훌륭하게 보이지만 하느님 눈에는 그런게 다 소용없는거다. 속마음을 보는거다.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 그 마음 하나만 하느님이 보신다는 거다. 여러분의 마음은 바리새인의 마음인가? 불효자의 마음인가?효자의 마음인가? 생각해봐야된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를 맺는게 그게 신앙인거다. "한번 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용돈 좀 덜 드려서 죄송합니다." 마음이 드려지면 그러면 부모의 마음은 행복한거다. 이 율법적인 관계를 끊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게 우리가 사순절에 해야 회개인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태생 소경을 고쳐주셨다. 침으로 흙을 개어서 눈에 발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씻었더니 깨끗하게 고쳐지고 보게되었다. 이 보게 되었다라는 말은 안다라는 말과 상관있다. 보면 볼수록 더 알게 되니까. 보고 아는 거다. 이 안다라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 연관있다. 알면 알수록 더 사랑스러워지니까.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부모가 자녀를 더 끔찍히 사랑하는 이유는 자녀가 보모를 아는 것보다 부모가 자녀를 더 많이 알기때문에. 어릴 때부터 손짓하나 발짓하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끔찍히 사랑하는거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우리의 눈을 고쳐주셨다하는 표징의 기적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고쳐주셨다라는 상징적인 기적이다. 요한복음의 기적은 상징성이 깊다. 그냥 육체를 고쳐주셨다. 대단한 분이다. 이게 아니다. 요한복음의 기적은 표징이다. 그 안에 뜻이 있는거다. 오늘 태생 소경을 고쳐주었던 표징 속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게 뭘까요? 사랑하는 마음을 넣어주셨다. 차돌같이 찬 우리의 심장을 빼내시고 살과 같이 부드러운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넣어주셨다 그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재생되었다, 창조되었다, 구원되었다, 고쳐졌다 그 뜻인거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거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병고침 받게 된 거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고쳐주셨다라고 되어있다.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신앙의 삶이, 신앙의 생활이 기쁘고 행복하고 충만한 그런 삶이 될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20230319
제1독서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6,1ㄱㄹㅁㅂ.6-7.10-13ㄴ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이 6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0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5,8-14
형제 여러분, 8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9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10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11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12 사실 그들이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13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14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0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11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12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18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19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20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22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24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25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26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27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30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또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6-9.13-17.34-38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6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