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류업 2023. 1. 8. 20:3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고백성사를 주다보면 신자분들이 참 열심히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신앙이 좀 발전되고 깊어지고 그런 신앙이 되고 싶은 열정에서, "노력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신앙이 깊어지지 않지요?" 그런 고민들을 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 꽤 애를 쓰고 사는 모습이 보인다. 솔직히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그렇고 우리가 생각한 만큼 신앙이 그렇게 막 커지나요?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신앙이 깊으신 분들인거 같다. 

 올해가 제가 신부 된지 30년 된 해인데, 돌이켜보면 보좌신부 때가 훨씬 더 신앙이 곧고 깊지 않았나 생각이 들고, 보좌신부 때보다도 신학생때 더 열정이 있고 신앙이 깊지 않았나 생각이 들고, 그런데 신학생 때보다도 신학교 들어가기 전 고등학교 때 그 때 신앙이 제일 곧고 깊은 신앙인이었다고 내 스스로 생각이 되는 시기가 중3 때부터 고3때까지이다. 그러면 신앙이 거꾸로 간거다. 내 자신이 한심해지기도하고.

 곰곰히 생각해봤다. 왜그럴까? 왜 30년 동안이나 매일 미사를 하고 매일 강론을 하고. 강론을 하려면 준비를 해야된다. 성경을 또보고 또보고 그리고 또 그 성경을 해석한 책을 보고, 그리고 또 생각하고. 그렇게 30년을 살았는데 왜 이럴까? 생각해보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핵심을 빠뜨리고 한 거라는 생각이든다. 핵심을 빠뜨리고 주변 것들만  붙들고 살아왔기 때문에 30년 신부생활을 하면서도 크게 성장하지 못한거다. 후회가 되는거다.그런데 이제 30년 만에 깨달은 거다. 참 한심하다.  핵심을 꿰뚫어야되는 거다. 그렇게 살아봐야겠다. 그 핵심이 뭐냐면 우리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핵심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그 믿음의 핵심이 뭔가? 그 믿음의 핵심은 '주님의 기도'에 있다. 주님의 기도 다 알죠? 자주하죠? 그런데 핵심을 놓치고 하는거다. 내가 그렇게 했다. 주님의 기도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고 기도중의 기도이고, 가장 완벽한 기도고, 가장 은혜로운 기도이다라고 신학교에서 배웠는데,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바치면서도 그 핵심이 빠진 기도였기 때문에 은혜도 없고 그 기도를 통해서 신앙이 깊어지지 않았던 거다. 그 핵심이 뭐냐면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라는 게. 아버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기도이다. 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진짜 내가 하느님을 내 아버지로 생각하고 믿고 그 기도를 바치고 있는가? 그게 핵심인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방인들처럼 빈말로 기도하지 마라."라고 하셨다.  우리가 빈말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 핵심은 하느님이 내 아버지다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 바쳐야한다.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 아버지와 관련된 기도이다. 아버지 만이 해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아버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아버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아버지 악에서 구하소서." 다 아버지. 이 기도의  한구절 한구절의 핵심 키워드는 아버지. 아버지라는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바치는 기도가 빈말기도이다. 믿음의 모든 교리의 핵심은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짜 믿는 마음으로 믿어야되는거다. 진정으로 믿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거다. 신앙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고, 깊어지지도 않고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고.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으면서 기쁘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은혜로운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인거다. 다른 이유가 없다. 감히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건데 이 가장큰 은혜를 빼 버리면 남는게 없는거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준거다. 그러면서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한것처럼 너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러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준거다. 핵심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다. 

선교사 한분이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가 사람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주님의 기도만 가르쳐줬다.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다른 거 다 몰라도 되니까 주님의 기도만 바치면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것만 가르치고 떠난거다. 몇 년 있다 어떻게 됐나 가보니까 마을 사람들이 다 물위를 걷고 있는거다. 좀 과장되긴 했다.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거다. 어떻게 됐나해서 사람들을 불러서 물어보니, "아니 당신이 가르쳐 준 주님의 기도만 했는데 우리가 다 이렇게 됐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어떻게 했는데 그런가 보니까 뒤에건 다 까막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기억이 나서  그것만 수년 동안 하니까 진짜  하느님이 내 아버지처럼 100% 믿게 되었다는 거다. 하느님이 내 아버지라는 믿음이 100%가 되면 진짜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1%도 안 믿는다. 진짜 100% 믿은 사람은 딱 한 사람이다. 예수님이다. 그래서 물위를 걸은거다. 세례를 받으면서 활동을 시작하셨다. 그게 공생활이다. 공생활의 첫번째 사건이 세례 받는거다. 세례를 받으면서 아버지 일을 시작한 거다. 왜 세례자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그 일을 시작하셨을까? 중요한거다. 우리는 세례를 죄를 용서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님은 죄도 없이 세례를 받았다. 물론 모범을 보이려고 그런다. 세례의 핵심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세례이다. 죄의 용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은 부차적인 것이다.. 세례성사는 새롭게 태어나는건데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의 딸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님 세례 받는 장면의 복음서를 읽어보면 하나같이 나오는게 죄가 용서 되었다는 얘기는 하나도 없다. 하느님 상속 이런 얘기 하나도 없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거다. 세례를 받으면서 예수님은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 100% 생겨난 거다. 그 전에도 믿음이 있었을거다. 그런데 공적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거다.비둘기가 성령으로 내려오면서 이 목소리가 들려온 거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마음에 쏙 드는 아들이다." 이 천둥같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평생 고난의 길도 이겨낼 수 있었던 거다. 예수님의 모든 삶속에 이 아버지의 음성이 함께 하고 있었던 거다. 힘들 때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 맞아.' 고난이 왔을 때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야.' 세속의 유혹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왕으로 모시려고 했었잖아요 그런 고비고비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 하셨는데, 그 기도는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야 하느님은 내 아버지야. ' 아버지한테 기도한 거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도 그랬다. 피땀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찾았다.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라 했지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도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예수님의 신앙의 핵심도 아버지였던거다. 그런데 우리와 다른거는 예수님은 세례 받을 때 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하느님이 내 아버지라는 믿음이 100%였다는 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 우리가 세례를 똑같이 받았다. 교리받을 때 얘기했다. "세례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거야." 그러면 그걸 믿어야 되는데 실제로는 안믿는다. 여러분들 밤에 돌아가셔서 씻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하느님을 진짜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나? 하느님을 진짜 내 아버지라고 믿고 있나? 그냥 머리로만 생각으로만 하고 있나?' 그래서 우리 신앙이 발전이 없는 거고, 깊어지지 않는거고 그래서 신앙생활이 기쁘고 은혜롭고 행복하지 못한거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 세례받을 때로 다시 돌아가서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 예수님이 당신 피흘림을 통해서 당신 피로 나를 목욕을 시켜주신 세례로 당신 자녀 삼아주셨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된다. 그래야 변화가 생기는 거다. 베드로는 12제자 중에서 이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은,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 하며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런데 한 제자가 "주님입니다". 예수님이 "나다". "어 예수님이네" 베드로가 그랬다. "주님이시면 저보고 물위를 걸어서 오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예수님이 "그래 와" 그러니까 베드로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상이면 어떻게 물위로 걸을 수 있겠는가? 정상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배에서 내려서 물위를 걸어서 갔다. 중간에 빠지기는 했다. 끝까지는 못갔지만 그런데 갔다. 뭐냐하면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시도를 못한다. 내가 사람인데 어떻게 물위를 걸어. 그렇다고 해서 진짜 물어들어가면 안된다. 이건 상징적인 사건이고 표징이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 못들어가는데 물위를 걸어서 갔다. '나는 사람이 아니야 하느님의 아들이지'그런 믿음이 있었으니까 된거다. 다른 것들도 똑같이 여기에 비춰서 생각해야된다.'원수를 사랑하라' 솔직히 안되잖아요 솔직히 안되죠. 미워죽겠는데 어떻게 사랑해요  내가 인간인데 사람인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해요. 시도도 안하잖아요. 그거는 하느님을 아버지를 믿은 사람이 아니다 시도는 해야되요 왜냐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딸인데, 하느님의 자녀는 할 수 있어, 물 위를 걸을 수 있어. 빠지죠, 분명히 빠지죠. 원수를 사랑하려고 시도는 해야된다. 그게 믿음이다. 그 시도 어디서 나오는거냐하면 그 행위는 어디서 나오는거냐하면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믿음에서 시도할 수 있는거다.  그 원천은 ' 하느님의 아들이다'이다라는거다. 만일의 여러분의 자녀가 돈 천원만 주세요하면 줘요 안줘요? 예쁘면 주고 미우면 안줘요? 미운짓해도 주잖아요. 이웃집 공부잘하는 잘 생기고 모범생 말 잘 듣는 이웃집 아들이 만원만 달라고 하면 줘요? 안줘요 말썽꾸러기라도 내 아들이기 때문에 주는거지, 아무리 착하고 공부 잘하는 이웃집 아들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선뜻 주지 않는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고 은혜를 주고 구원을 주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거는 아들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남의 집 아들은 안 주는 거다. 내가 하느님을 진짜 아버지라고 믿는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거지 믿지도 않는데 남의 집 자식인데 왜 줘요? 우리가 지금 그러잖아요 진짜 아버지라고  믿지도 않으면서 맨날 달라고 하면 안준다. 그래도 주나요? 안주죠. 당연히 안 준다. 어쩌다가 줄지는 모르죠. 핵심은 그거라는 거다. 내가 하느님을 진짜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데, 무슨 염치로 달라고 그러나? 안 주는 게 당연한 거다. 기도했는데 안들어주셨다. 당연한 거다. 그걸 가지고 섭섭해하면 안되는거다. 그래서 우리는 한달동안 이 다른 기도 다 해도 좋지만, 이 기도만 해보세요 아프리카 원주민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것만.이 기도를 머리속에, 입에 달고, 마음 속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다가 하늘에 계신을 빼도 되요. '아버지, 아버지' 계속 되뇌이는거다. 조용히 시간이 날 때는 그리고 길을 걸어갈 때, '아버지' 하고 숨 한번 쉬고 들이마시고, '아버지' 하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호흡에 맞춰서. 한걸음 가면서 '아버지' 하고 숨한번 쉬면서, 호흡에 맞춰서 한번 해보세요  호흡을 밑에까지 천천히 내뱉고 천천히 들이마시고 '아버지' 숨을 조금 조금씩 늘이면 더 좋다. 그러면 한달 하면 내 믿음 내 생각 내 마음도 바뀌는 거다. 그러면서 기도의 맛을 더 느낄 수 있게 되고 또 은혜도 받게 되고, 그러면 내가 아버지의 자녀로써 노력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그러면 내 삶도 바뀌는거다. 그렇게해서 진짜 100%  내가 하느님 아들이야 하는 믿음까지 예수님 수준까지 가려고 해야한다. 다른 기도도 좋지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제일 중요한거다. 제일 많이 바쳐야지.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라는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를 길러주신 우리 아버지는 잊어버리세요 왜냐하면 육신의 아버지는 단점이 있잖아요. 그런거 때문에 아버지와 연결시키면 안된다. 하느님 아버지는 완전히 우리가 상상하는 아버지 이미지보다 훨씬 더 자비롭고 사랑스런운 아버지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하느님이니까. 한번 한달동안 그렇게 기도하고 기도모임에 와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안 바뀌었다 그러면 나한테 따로 오세요.

2022.1.6(금) 성령기도회